밭의 잡초를 뽑으면서
밭의 잡초를 뽑으면서
  • 전주일보
  • 승인 2024.03.28 15: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규풍/수필가
최규풍/수필가

어느 해 두 달 보름 동안 봄 가뭄이 심하여 들 샘에서 바닥까지 긁어 담은 물을 주어도 남새들이 결국은 이겨내지 못하고 시들어 죽었다. 그런데 잡초는 달랐다. 잎과 줄기는 시들어도 가뭄을 이기려고 안간힘을 쓰고 몸부림을 치느라 뿌리는 더 깊어지고 억세어졌다. 그러다 어느 날 단비가 내리면 잡초는 함성을 지르며 만세를 부른다. 금세 기운을 회복하여 무성해진다.

잡초는 돌보지 않아도 울지 않는다. 잡초는 비료를 주지 않아도 악착같이 산다. 농약을 치지 않아도 벌레를 물리치고 탄저병도 얼씬거리지 못한다. 욕을 해도 화내지 않고 발로 짓밟아도 불가사리처럼 일어선다. 주인이 뽑아서 내팽개쳐도 생을 포기하지 않고 며칠을 버틴다. 그러다가 비라도 내리면 새 뿌리를 박는다. 생명력이 강하다. 아니 독종이다.

잡초를 보면 외할머니 생각이 난다. 콩밭의 풀을 매러 먼 길을 지팡이 짚고 꼬부라진 몸으로 다녔다. 외할머니가 아들 하나에 딸만 셋인데 아들을 빨치산에게 잃었다. 외할머니는 둘째인 우리 어머니한테 의탁했다. 지팡이를 짚고 사는 꼬부랑 할머니였다. 날이 저물도록 밭에서 호미로 잡초를 캐는 날 밤에는 굽은 허리를 두드렸다. 나는 외할머니랑 작은 방에서 자서 외할머니의 한숨 소리를 잠결에 많이 들었다. 염불인 나무아미타불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밤마다 죽은 아들 생각을 하신 것이 분명하다. 내가 외할머니처럼 노인 되어 풀을 뽑으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외할머니가 지금까지 살아계셨다면 제초제를 뿌려 고생을 덜 것인데 너무 힘들게 사셨다.

제초제는 잡초만 죽이는 게 아니라 땅속의 지렁이와 땅강아지도 죽인다. 예전에 제초제 입제를 고랑에 뿌렸는데 이랑에 콩을 심으니 콩이 싹이 나더니 시들했다. 고랑에 가까운 콩은 난쟁이가 되어 수확도 줄었다, 그 뒤로 다시는 입제를 쓰지 않고 엽록소를 파괴하여 풀을 시들어 죽일 제초제를 뿌린다. 이웃 농가의 주인은 한사코 제초제를 거부한다. 잡초가 무성해도 방치한다. 나중에 손으로 일일이 잡초를 뽑아내고 마늘도 심고 무도 심고 배추를 심는다. 잡초도 살리고 채소도 살리고 땅도 살리고 지렁이도 살리니 얼마나 자비로운가. 나도 그러고 싶어서 작년 가을에는 뿌리까지 죽이는 근사미 제초제를 모처럼 안 뿌렸다. 봄이 오니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다. 밭에 시금치와 쪽파, 대파와 고수, 달래와 봄배추를 심어서 겨울을 났는데 잡초와 엉켜서 볼만하다. 주인이 바뀌었다. 잡초밭이다. 잡초가 안방을 차지하다니 내 불찰이다. 호미로 잡초를 뽑는데 고집이 여간 아니다. 가꾸는 것은 손만 스쳐도 뽑히는데 나지 말라는 잡초는 잘도 자라서 뿌리가 깊고 질기다. 안간힘을 써야 겨우 손들고 뽑혀 나온다.

잡초가 나를 비웃는다. 쪽파밭에 기생한 잡초가 한눈판 사이에 무성하다. 잡초의 뿌리가 파의 뿌리를 휘감고 거름을 빼앗아 먹고 있다. 쪽파는 힘도 못 펴고 핼쑥하다. 좀 일찍 올 것을 쪽파에 미안하다. 쪽파가 나를 게으르다고 나무라는 것 같다. 작물은 주인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대파밭을 바라보니 여기도 잡초들의 행패가 극심하다. 시금치밭도 잡초가 기세등등하다. 시금치가 정신을 못 차린 틈을 노려서 잡초는 번지르르 때깔도 좋고 호시절을 만났다. 시금치는 고개를 숙이고 힘이 빠지는데 잡초는 고개를 쳐들고 억세다.

잡초는 강하다. 안간힘을 다하여 뽑으니 마지못해 끌려 나온다. 왜 잘 되라는 채소보다 되지 말라는 잡초가 더 무성할까? 잡초를 다 매고 수일 후에 다시 가 보면 어느새 잡초가 다시 살아나기도 하고 땅속에 숨어 있던 씨가 싹을 틔워서 새 세력을 이루기도 한다.

한동안 내가 소홀한 틈에 잡초가 채소를 억눌러 질식시켜 버리듯이 우리의 정신이 물질에 잠식되고 질식당하지 않을까. 밭의 잡초만 뽑을 게 아니라 내 마음속 잡초를 뽑고 싶다.

뽑아도 뽑아도 숨어 있다가 다시 나는 잡초처럼 오래 맛들인 악습과 훈습의 뿌리는 모질다. 다름 아닌 탐욕, 진에(瞋恚), 우치(愚癡)의 발로다. 이 삼독(三毒)의 마음 잡초가 천만 가지 번뇌를 끌어안고, 막강한 세력으로 군림하여, 사나운 독사처럼 혀를 날름거리면서, 온갖 번뇌를 일으키고 심신을 해친다. 내 마음속 잡초는 어려서부터 괴롭히더니 노구에도 덤빈다. 마음을 놓고 한눈파는 사이에 꼬리를 치켜든다.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