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청(下請) 계층의 신음
하청(下請) 계층의 신음
  • 전주일보
  • 승인 2018.12.16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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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에
김 규 원/ 편집고문

미세먼지가 연일 ‘나쁨’과 ‘매우나쁨’을 되풀이하는 겨울이다. 오늘도 초미세먼지가 절정을 보이다가 밀려 나간다는 예보다. 먼지가 밀려 나가면 조금 숨 쉴만한 틈이 나오려나 싶다. 정말 요즘 같아서는 어디 공기 맑은 곳을 찾아 도망이라도 가고 싶은 심경이다. 연일 매캐한 대기에 숨 한 번 크게 들이쉴 수 없으니 내가 조금만 젊은 나이였다면 진즉에 이 나라 포기하고 숨 들이쉬어도 좋은 데로 이민이라도 갔지 싶다.

요즘에 내가 이렇게 미세먼지 타령을 하며 노닥거리고 있는 동안에 또 한 번 마음 아픈 일이 일어났었다. 지난 11일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석탄운반 컨베이어 아래서 떨어진 석탄을 치우던 김용균 청년이 컨베이어장치에 머리가 끼여 끔찍하게 죽임을 당했다. 발전 연료인 석탄을 분쇄하여 이동하는 기계장치가 돌아가는 공간에서 혼자 일하다가 몸이 끼었는데, 그 장치를 멈추어 줄 누구 한 사람이 없어서 그대로 죽어야 했던 젊은 그는 겨우 24살이었다.

24살, 누구는 한창 빛나는 청춘을 구가하며 데이트하랴, 해외여행 계획 마련하랴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데 그는 석탄가루 속에서 홀로 일하다가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했다. 그는 하루 12시간을 꼬박 일하는 중노동을 혼자 맡아 했다고 한다. 사고가 난 태안화력발전소에서는 2010년부터 지금까지 12명이나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화력발전소는 그 위험하고 힘든 노동은 직접 하지 않고 하청 업체에 맡겨 처리했는데, 하청 업체는 위험한 그 일에 두 사람이 함께 근무해야 하는데도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한 사람이 감당하게 했다. 요즘에 내가 힘들어하던 미세먼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석탄가루를 12시간 내내 들이마시면서 일하던 그의 가방 속에는 컵라면 3개와 과자 한 봉지, 고장난 손전등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당연히 지급되어야 할 헤드 랜턴도 없이 손전등을 비추어 검은 석탄을 찾고 올리다가 변을 당했다.

그는 힘든 일을 하면서 컵라면 하나로 끼니를 때웠다. 동료가 있었더라면 잠시 라면이라도 편히 먹었을 터이지만, 식사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아 컵라면에 석탄가루를 섞어 먹으며 긴 작업시간을 버텼을 것이다. 2015년, 구의 전철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숨진 19살 김군도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바쁜 일정을 맞추었다고 했다. 그 김군 역시 하청 업체의 직원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의 노동계에도 신분 계층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듯하다. 많게는 억대 수입을 올리면서 깐깐하게 고용주와 따져가며 연봉인상, 복리후생, 경영 참여까지 주장하며 걸핏하면 집단쟁의를 벌이는 상위 노동자가 있는가 하면, 끼니조차 컵라면으로 때우며 목숨을 걸어야 겨우 목구멍에 풀칠하는 두 김군 같은 하청 업체의 비정규직 노동자들까지 보이지 않는 노동 신분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안전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단축된 근로시간을 준수하며 넉넉한 연봉을 받으면서도 수시로 이슈를 만들어 기업주나 정부와 맞서 투쟁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귀족 노동자들은 위험하거나 힘든 일은 하지 않는다. 그런 일은 하청업체가 맡아서 하는 것이 관습처럼 박혀 있다. 더럽고 힘들고 귀찮은 일은 하청업체에 다 맡겨 처리하고 하청업체의 재해는 회사 근로자의 재해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다. 사고가 났던 태안화력도 무재해 사업장으로 표창을 받고 직원들 상여금도 두둑하게 지급했다는 보도도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원청 집단과 하청 집단이 갈려 있다. 원청의 세계는 정상적(?)인 사람들이 사는 사회다. 열심히 일하면 보상도 있고 장래에 희망도 있어서 살만한 사회다. 그들은 하청 집단을 이용하여 어렵고 힘든 일은 다 처리하면서 이른바 ‘사는 것 같이’ 산다. 사는 집이 다르고 타는 차량이 다르고 생각하는 범위도 하청 집단과는 사뭇 다르다. 물론 먹는 음식의 종류부터 원산지까지, 그 이름까지 모두 다르다. 그들의 모든 것은 ‘때깔’이 나고 하청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씀씀이를 자랑한다.

반면 하청 인간들은 원청이 불러 하청을 주지 않으면 생활을 할 수 없다. 원청의 주변에서 그들이 해야 할 험한 일이나 힘든 일을 찾아 처리해주며 산다. 하청 일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비정규직이다. 언제 하청이 올지 모르는 데 상시 일꾼을 쓸 수 없으므로 일이 있으면 부르고 없으면 대기할 수밖에 없다. 그런 그들에게 내일이라는 이름은 불안하고 걱정스러운 미래다. 당장 내일 일이 있을지 모르는 대기 인력에게 희망이 있다면, 위험하더라도 계속해서 일을 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양반이던 사대부가 있고 그 아래에 중인과 천민, 노비가 있었던 것처럼 우리 사회에도 자본가가와 원청인간과 하청인간의 신분계층이 형성되어 있다. 자본가는 돈의 힘으로 만사를 해결하면서도 더 많이 벌기 위해 온갖 짓을 마다하지 않는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하청계층 몇이 죽어 나간들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원청인간들은 편하고 안전한 자본가의 날개 밑에서 험한 일은 하청 인간에게 미루고 사는 사람들이다.

이런 계급 사회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과학문명 사회에 과연 적합한 일인지, 이러다가 인공지능이 모든 것을 다 수행하면서 인간들이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하청 인간으로 남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때늦은 일이지만, 어둠과 고통 속에서 목숨을 잃은 청년 김용균의 명복을 빌어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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